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마도.

 눈도 뜨지 못하고 울고 있는 그 표정이 또 다른 의미일 수 있을까. 갓 태어난 아기가 의례 짓는 표정이라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빠인 내 눈에는 딸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이 선명하게 읽혔다. 아기를 엄마 가슴위에 올려주었지만 아기는 울음을 그칠 줄 모르고 점점 더 큰 소리로 울어댔다. 그 상황에서 간호사들은 내가 딸에게 편지를 읽어주길 부드럽게 강요했는데 일종의 정해진 프로그램 같은 것이었다.

 아내가 진통을 겪는 동안 아기가 태어나면 읽어주려고 써둔 편지가 있었다. 물론 쓰면서 상상했던 장면은 평온한 표정으로 바깥세상을 맞이한 딸과 사랑이 담긴 나긋한 목소리로 편지를 읽어주고 있는 아빠의 모습이었지만 딸은 예상과 달리 심한 괴로움에 소리 지르고 있었다. 특히, 사람 목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했는데 의사든 간호사든 낯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면 어디론가 있는 힘껏 도망치고 싶다는 듯 더 힘을 다해 울었다. 그것은 아빠인 나의 목소리에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엄마의 목소리에만 아기는 울음을 그치고 안정을 취하는 듯 했다. 이 세상의 유일한 피난처인 셈이다. 아기는 어둠 속에서 손으로 더듬거리듯 엄마의 목소리를 찾고 또 찾았다.

 “나중에 읽어줄게요.” 정중하고 단호하게 얘기했다.

 간호사들은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재차 내게 낭독을 요구했지만 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내가 딸을 위해 지금 해줄 수 있는 것은 침묵. 딸이 엄마의 목소리를 더 잘 들을 수 있도록 침묵하는 일이었다.

 2013년 9월 18일 오후 8시 30분. 예채는 아름답고 따뜻했다. 나는 딸에게 아빠의 침묵을 첫 선물로 주었다. 건강히 태어나줘서 고맙다, 사랑하는 딸 예채야. 속으로 되뇌고, 되뇌고, 되뇌었다.